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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최고의 영화

캐빈 인 더 우즈 (The Cabin in The Woods, 2011)

 현대 영화가 관객에게 극한의 공포를 제시 하는 것이란 갈수록 어려워진다. 영상으로 경험하는 공포의 전략은 클리셰라는 단어의 의미보다 더욱 재미가 없어지며 공포 영화라는 장르 면에 비추었을 때 관객은 다음 장면에 대한 반동을 위해 심리적 기대 혹은 대비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예측 가능하다면 영화는 못 만든 작품으로 단호히 평가된다.

 아이디어의 딜레마에 빠진 현대의 공포 영화는 고르노를 포함한 사지절단의 예술을 선보이며 오락성을 극대화 하는가 하면, 과거의 명작들을 수도 없이 리메이크하고 특징만 빌려 어설프게 만들어 영화를 졸작으로 취급받는 단순한 시대로 전락한다. 블록버스터는 갈수록 진화하지만, 공포 영화는 그렇지 않다. 관객의 수준은 높아지고 공포 영화는 이제 더 이상 순간적인 재미를 선사하는 짧은 놀이기구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지 못할 뿐이다. 


 단순히 오락과 재미의 목적으로 사지가 절단되는 비현실적 장면을 보는 쾌감은 순수한 공포와는 거리가 있다. 때로는 철학적인 관점을 통한 인류 문명과 관련된 존재 자체의 공포감, 그리고 초자연적 성질 혹은 인간들을 무감각한 시선을 통해 살해 하는 공포의 초월성은 결국 더욱 사실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제 매체에서의 공포는 오락의 일부일 뿐이다. 

 사실 관객을 놀려 먹겠다는 심산으로 만들어지는 파운드 푸티지 필름보다 <캐빈 인 더 우즈>는 샘 레이미의 방식처럼 인물들을 요리하도록 만들어 관객들은 그것을 즐기도록하고 그 자체를 순수한 오락 영화로 만들어버린다. 

 이 영화는 대놓고 당대 어떤 영화에서도 보여주지 않았던 모든 지식과 상상을 결합 시키고 만다. 특히 <캐빈 인 더 우즈>라는 제목은  시작과 함께하는 배경에 불과하다. 다만 이 영화의 제목을 한층 흥미를 부각시키지 못했던 이유는 지금 자체의 의도는 좋았지만 다르게는 영화가 처음부터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다 보여주기 때문이다. 공포 영화를 조금만 접하기만 해도 "설마"가 이 영화에서는 진짜가 된다. 스토리 적으로 예측이 가능하다는 관점은 아니다. 이제 공포 영화에서 저 인물이 살았으면 좋겠다라는 심리적 공식은 낡았다고 느껴지나보다. 이 영화는 여러모로 성격이 샘 레이미의 <드래그 미 투 헬>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다섯 명의 개성 있는 젊은 남녀들은 지도에도 조차 없는 외딴 숲의 통나무 오두막으로 놀러 가기로 했다. '위치도 모르는 그 집은 어떻게 알았느냐' 라고 물어본다면 그것은 뻔한 맥거핀일테지만 이것 조차도 벌거벗고 춤추는 듯한 재미가 기다리고있다. 오두막집을 도달할 쯔음엔 불길한 사람이 등장하면서 이상한 소리를 하더니, 당연히 이들은 그 경고를 무시하고 보기만해도 음산한 목적지에 도착한다. 시간이 지날 수록 그들은 무언가 우연같은 상황 속에 엮이면서 통나무의 지하실을 발견하고, 그 안에 무수하고 괴상한 물건들을 집으며 무언가를 작동시켜버리고, 쇼가 시작된다.


 창의성을 최소화 시키는 것에 비해 공포 영화 매니아가 한층 즐겁게 볼 수 있게끔 활용시켜주는 것이 바로 <캐빈 인 더 우즈>의 장점이다. 질 낮은 CG는 다소 거슬리는 수준이지만 그다지 영화 자체의 퀄리티에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다. 특히 이 영화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보면 그만큼 수확율이 높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