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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Alice In Wonderland, 2010)

 시간이 흐를 수록 믿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이 쌓여져 가고 있지만, 나는 아직도 누구나 자신이 믿는 환상이란 것은 존재한다고 믿는다. 특히 팀 버튼은 자신이 믿는 한 구석에서 말 그대로 극장의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을 아주 재미있게, 즐겁게서도 흥분되고, 심지어 사랑스러운 환상의 세계를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누구나 알고는 있는 사실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를테면 "그가 지금 상당한 아성을 부풀고 싶어한다"든가, "지금도 그는 죠니 뎁과 함께 '고딕 듀오'의 세계에 대한 욕심을 부리고 있는 철 없는 꼬마이다."등 수 많은 이유로 팀 버튼을 헐뜯고 싶어 한다. 그건 말이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현실이니까.

  어렸을 적의 앨리스에 대한 기억은 그리 선명하지 못하다. 이상하게도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 (Snow White And The Seven Dwarfs,1937)이나 <피노키오>(Pinocchio,1940) 같은 작품들은 또렷히 기억이 나는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원작을 보았는데도 내가 상상하기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는지 그 어릴 적의 원더 랜드는 마치 앨리스가 꿈에서 본 것 처럼 나 역시 묘연하도록 거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수 차례 보아도 기억이 잘 자니 않는 <모노노케 히메>역시 그랬다. 2010년에 다시 재창조된 팀 버튼의 이 영화는 앨리스가 성년에 나이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항상 똑같은 내용의 꿈을 꾼다. 그녀의 아버지는 생전 자신을 위해 그 악몽에 대해 어렵지 않음을 설명해주고 그녀는 안심한다. 그 이후 똑같은 감정은 반복된다. 꿈을 꾸고, 무서울 때는 그녀의 아버지가 안심시켜주고. 결혼의 나이에 접어들 무렵 앨리스는 이상한 토끼 한 마리를 보게된다. 그 마지막 소녀는 이 익숙한 경험을 통해 다시 한번 이상한 나라 원더 랜드로 향한다. 이 점은 매우 흥미롭고 마지막 체스 전쟁의 투사로 변신하는 앨리스가 매우 새롭게 느껴지지만 관객은 그 주변에서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상한 나라의 캐릭터들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모자 장수만은 이를 알고 있으리라. 전체적으로 앨리스는 그녀가 접하는 세계에 대한 정체성을 가지며 역시 자신의 꿈과 현실의 경계에 대해 혼란을 겪는 인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러나 이런 부분이 가슴 뭉클하거나 감동적인 결과를 이끌지는 않는다. 또한 앨리스만이 영화를 전체적으로 끌어낸다고 하기에는 어딘가 모호함이 크다. 모두가 이끌어 낸다는 훌륭한 교훈적인 결말은 존재하지만도 말이다.
 모든 것이 익숙하면서도 새롭게 꾸며대는 것이 필요한대도 팀 버튼은 그런 환상에 대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모든 상황을 기다리고 있는데도 결말을 예상하고 있기 때문에 이 영화는 어떠한 폭발적이거나 짜릿한 근사함을 선사하는데 실패한다.
 디즈니의 세계의 충실하려면 일련의 조건을 따르는 것 같다. 우선은 동심을 사로 잡기 위해 너무나도 단순하고 예측 가능한 결말을 필요로 해야하고, 끊임 없이 흥분되는 세계를 구현해야 하는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대해 모두가 갸우뚱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이미 결말을 예측하고 있고, 스스로 그런 것은 아닌데도 이미 쇠퇴적인 내용 구성 등 팀 버튼은 서서히, 주저 앉은 걸까 하고는 말이다. 그는 앨리스를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보낸다. 그래, 너는 괴짜야. 하지만 모든 멋진 사람은 괴짜거든.
 
 한편으로는 이 영화가 등장할 무렵 공개된 죠니 뎁의 기상천외한 분장이 눈길을 이끌었는데 팀 버튼과 죠니 뎁이라는 "고딕 듀오"의 아성은 서서히 무너져가는 기분이다. 죠니 뎁이나 팀 버튼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독하게 마음 먹어도 변하기 힘든 것은 팀 버튼이라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닐수도. 형식주의의 세계에서는 식상함이 존재하기 마련이니 너무 무리하게 기대하지도, 실망할 준비도 하지 말자.



 "가끔은, 이 현실이 무뎌질 때가 있다. 그 것이 바로 이상한 나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