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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랜드 뷔페 (La Grande bouffe, 1973)

 어떤 연기나 상황 연출에 대해서는 분명히 가능하지만 너무나도 괴기스럽고 소화하기 힘든 장면을 창조하는 것은 영화의 비범한 기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감독들은 감히 그러한 소재를 꾀하려고 하지 않는다. 기꺼히 그런 영화를 만드려는 감독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만약에 끔찍한 영화를 만든다면 다수는 그 것은 관객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거고 말이다. 그 누구도 감독의 생각 전체를 알 수는 없는 법이다. 만약에라도 우리가 감독의 생각을 반 이상 읽어냈다면 그건 그의 작품이 그 정도로 노골적이라고 밖에는 설명하기가 힘들다. <그랜드 뷔페>는 그 정도의 범위를 초월시키는 무식한 작품 중 하나이다.

영화 <그랜드 뷔페>는 네 명의 중년 남성들의 마음 속 공허함을 해소하기 위한 반어적 무대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극중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은 배우 자신들의 실제 이름으로 직접 등장하셨단다. 이들의 직업은 판사, 비행사, TV 출연자, 음식점 사장으로 부르주아를 대표하는 직업으로 설정되어있다. 그들이 그랜드 뷔페를 시작하는 의도는 마르코 페레리의 견해에 반영된 상황이다. 이 인간들은 이미 금전이라는 물질이 더 이상 목적 그 자체가 아닌 원래의 목적, 즉 소비의 형태이다. 그러나 영화는 우리가 바랬던 그 모습이 실제로는 답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어째 나이를 먹으면서도 추태하게 행동한다. 넓은 정원에는 평화롭게 애완 동물들이 뛰고 다니지만, 반면 저택 내에서는 죽은 동물들이 썰린 채 핏물고인 고깃덩어리가 되어 이 사람들의 입속에 품위 있게 들어간다. 이처럼 영화는 내내 인간의 멍청한 모습을 이렇게 노골적이고 짖굿은 방법으로 보여주는데, 딱히 말해서 부르주아의 행태를 고발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 불가능할 법한 사실을 영화로 하여금 극대화시켜 보여줌으로써 풍자시킨다. 분명히 마크로 페레리는 이 천박함을 혐오스럽게 보여주자는 사상적인 견해를 보여줬을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우리가 보는 이 끔찍한 장면들이 당연하기에, 이 세상에서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수동적인 정신의 꼭두각시가 어쩔수 없음을 암시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랜드 뷔페> 속 남자들은 극히 그 미련한 행동에 대해서 혐오를 갖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아무런 감각 없이 떳떳해한다. 나이를 먹으면 누구나 그 이전보다는 조금 더 품위 있고 멋지게 살고 싶은 욕망에 사로 잡혀있지만 이들은 그것조차 지겹다는 것이다. 이미 잃은 것은 다 잃어보고 얻은 것조차 다 얻은 사람에게는 더 이상의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이 쫓는 것은 하나 밖에 없다.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욕구'.
 그 행동에 대한 이유는 만들면 된다. 가령, "우리는 돈은 많은데, 나이가 많아서 할 일도 없고 사는게 따분해." 이 것은 합리적이지 못할지라도 분명한 그들의 이유가 된다. 배우들이 이 바보같은 행동을 보여주겠노라 하면 감독의 의도는 그로테크스하면서도 코믹한 장면을 통해 을씨년스럽게 그런 가능적인 인간상을 보여주고, 스스로 자멸시키도록 유도한다. 그 자멸하는 모습은 우스꽝스럽지만 우리는 풍자가 무엇인지 알기에, 이는 쉽지 않은 공포심을 초월한다.

 어떻게든 사람은 만족감을 즐기지 못한다면 인생은 슬픔 그 자체라고 말하기도 한다. 분명히 죽기 전에 내가 어떠한 행동을 하리라고 다짐을 하는 바는 그건 욕망이 아닐 가능성도 충분하다.  예를 들어<버킷 리스트>나 <노킹 온 헤븐스 도어>는 죽음을 향한 사람들이 무언가 꼭 해보거나 보고 싶었던 것을 말했지만 <그랜드 뷔페>에서 등장하는 사람들은 다르다. 단지 죽음을 향하는 자신의 낡은 모습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성공하는 자들의 공허함을 죽음으로 몰고 싶어 자폭하는 환경이다.

 <그랜드 뷔페>는 엄청나게도 복잡할 수도 있는 사람의 행동을 단 두 가지로 표현시켜준다. 식욕과 섹스만이 이 영화의 표현이다. 사람들은 한도 끝도 없이 먹기만하고 알 수 없을 정도로 친구의 여자 친구와 섹스를 한다. 그러고서는, 요리하는 장면을 멋지게 보일려는 의도는 절대로 아닌데도, 그들은 엄청난 돈을 들여 내 놓은 고깃덩어리의 집합을 요리하는 것을 웅장하고 품위롭게 보여준다. 그런데 이 것은 아주 재미있는 조율을 보여준다. 일부러 보는 것조차 견디기 힘들 정도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 멋지고 우아한 요리을 만드는데 있어서는 앞 부분은 먹고 토하는 것이고, 뒷 부분 마저 먹고 방귀를 뀌는 모습이 서슴없이 존재한다. 이 영화는 어떠한 점에서 빈약하기도, 혹은 아니기도 하다. 인간의 과다 섭취와 섹스 충동을 거리낌 없이 표현했다는 단순한 표현이 존재하면서도 빈틈이란 항상 남아있다. 그러나, 빈틈으로 인해 보는 사람도 모르게 서서히 물처럼 흘러간다.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은 돈 많은 자들이 평생의 만족감으로 거머쥔줄 착각한다. 그 누가, 돈이 많다기 때문에 행복하고 언제나 충만한 만족감이 영원이 지속된다고 하는가.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다. 마크로 페레리는 <그랜드 뷔페>를 통해 그것을 고발할 것이다. 그 동시에 그 자신조차 감당하기 힘든 이런 결과를 불러온다. 영화 감독으로서 자신의 작품에 대한 책임, 자신의 영화를 보는 공공에 대한 책임이 아닌 자기 인생의 약력 또는 역사로 남을 작품에 대한 자기 자신의 책임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