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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하녀 (The Housemaid,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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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번은 시네마천국에서 되새김질을 하여 재발굴한 감독이 있었다. '김기영'감독이다.  글쎄, 수 십년 이전의 한국의 영화 시장은 어땠을까. 확실한 것은 그 때 힘든 한국이었으니 동시에 영화 시장이나 경향에 대해 짐작할 수는 있겠지만 그 짐작으로는 몸과 눈으로 느끼지 못해 그 이상의 짐작을 가늠키 어렵다. 김기영 감독은 그 시대에 대한 대화를 함과 동시에 새로운 시도로서 몸은 던졌다. 그는 매우 독창적이다. 내가 처음 접한 그의 작품, <하녀>이다.
 글쎄, 간략히 말하자면 분명히 60년대의 필름과 그 시대, 말투, 삶의 세태인데도 강렬하다. 왜 어렵지만 아름답거나 끌어 당기는 힘이 있는 영화들을 만드는 사람들은 왜 어딘가 확실하면서도 크게 강한 여운을 남기는 것인지 궁금하다. 하녀는 그런 작품이다. 관객에게 충격을 담겨야 해서 일까? 아니면 단순히 그 자신만의 표현에 대한 욕심인 것인가.

 이 영화에서는 여러 작은 사건들이 등장한다. 그 이야기를 제끼고 하녀 이야기에 들이대보자면, 작곡가인 동식 (김진규)는 아내가 없는 사이 자신을 유혹하는 하녀(이은심)와 관계를 갖는다. 동식은 선천적으로 사악한 인물이 아니다. 하녀가 그와 함께 살고 싶은 의미에서 관계를 갖고록 시도해보는데, 여기까지 보면 분명히 하녀는 하녀가 아닌 한 여자이자 사람으로 다시 살고 싶은 의지가 보인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상당히 잔인하기까지 하다. 결국 아이를 갖게된 하녀. 동식은 그 사실에 대해 매우 불안해한다. 일찍이 동식은 아내에게 그 사실을 고백한다. 그리고 그녀는 하녀에게 아기를 유산시키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하녀의 모습은 비참해지기까지한다. 아이를 갖고 키워 가족을 만들고 싶다, 혹은 자유를 찾고 싶다의 심정은 두드러지지만 이 중에서도 전자의 심정이 더욱 강하다. 긜고 동식의 아내는 하녀를 죽이기까지 하지만 하녀는 매우 영악하다. 자신을 독살하려는 것을 눈치챈 하녀는 동식의 집안을 협박한다...

 모든 행동에는 반응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내용이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중반까지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 중반을 넘게 접어들어서야 이 영화가 하녀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 하녀는 하녀 답지 않은 과감함과 잔인함을 보인다. 혹은 그런 하녀를 질타하며 모함하고 죽이려는 동식의 가족의 모습도 그다지 좋아보이지는 않다.

 다시 김기영 감독과 관련해서 이야기해보자면 하녀는 매우 독창적인 작품이다. 혹은 너무 현대적이면서도 한국적인 스릴러의 활용성을 잘 보여준 작품이었다고 느낀다. 그러나 왠지 이 영화는 모호한 구조를 띈다. 의미가 없기도 하는 그들의 행동은 심리적으로 강렬한 모순인 듯도하다. 영상적인 구조, 인물들의 행동과 말투 모두가 흠잡을 것 없이 완벽하고 섬세한 작품이었지만 단지 이야기에 비추어보았을 때 <하녀>는 확답을 내리기엔 상당히 어렵고 무서운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