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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최고의 영화

저수지의 개들 (Reservoir Dogs, 1992)

 6명의 남자가 식당에 앉아있다. 마돈나의 "Like A Virgin"을 시작으로, 모처럼 일상적이고 의미 없는 대화로 가득한 테이블. 한참 떠들고 나서야 그들은 슬슬 자신들이 이 자리에 모인 목적을 설명한다. 그 이야기가 끝나고서는, 재치있는 사운드트랙 한 곡이 켜지고 배우들의 이름이 나온다. 그러나 관객은 그 어떤 불길함도 예지하지 못한채 영화의 결말과 가까운 긴박한 장면을 접하게된다.


 타란티노의 데뷔작인 <저수지의 개들>은 주요 범죄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 영화이다. 이 독특한 영화는 엄청난 양의 대사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 중 대부분의 내용은 영화의 내용과 관계 없는 수다이다. 타란티노는 수다의 미학을 강조하곤 하는데, 그렇든 안그렇든 이러한 작품적 특성은 그의 초기작부터 확인을 할 수 있다. 내가 끌렸던건 사실 이런 부분보다도 그가 고르는 영화 음악이라는 점이었다.


내가 처음 타란티노의 영화를 보았던 것은 바로 <킬 빌>이었다. 그 작품은 영상, 연출 뿐만 아니라 음악까지 내겐 너무나도 완벽한 작품이었다. 당시에는 내가 영화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였고 유명하거나 내가 좋아하는 감독이나 배우가 나온다면 별 사전 검색 없이 닥치는 대로 보았던 것 같다.

 특히 나는 쿠엔틴 타란티노를 열광하던 시기에 내용이 어땠든 그의 영화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본 <저수지의 개들>은 단순히 '타란티노의 초기작'의 성격이 강했다는 것을 수 년이 지난 뒤에도 느끼곤 한다. 그리고 이 영화가 내게 너무나도 많은 것을 알려주었는데, 일단은 타란티노 연출 스타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또한 그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었고 이 영화의 주요 소재인 하이스트 필름을 포함한 작품 기법 등 다양한 기초적 지식을 알게 해주었다. 아마 이 영화가 적어도 나에게는 '영화란 어떤 것인가'를 반론하며 새로운 지평을 펼쳐주었던 것이 틀림 없었다.



 당시 나는 처음에 이 영화를 보면서 엉켜진 사건 전개 방식이 익숙치 않았기에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렸고, 요즘 영화처럼 범인이 누구인지, 어떻게 죽는지에만 관심을 가지는 변태같이 물고 늘어지는 요즘 영화보고 싶어했던 것 같았다. 요즘 영화를 접했던 당시에 경향에 휩싸여 어느 특정하고 정형화된 영화 감상법이 박혀 있었던 것 같았다. 그것과 관련하여 이 영화의 내용이 참 기가 막혔던 것이 결말이 매우 극단적이었다는 것이다. 다섯 명의 강도가 범죄를 계획하고 실행해 옮기나 누군가의 밀고로 엉망진창이 되고, 흩어진 멤버들이 하나 둘 씩 창고로 다시 모여 배신자를 색출하는 내용. 하지만 이 영화는 특이하게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일단 앞서 말한 것 처럼 은행 강도 장면은 전혀 등장하지 않고 과거를 솎아내며 이야기만 끝없이 해대는 것이다. 이쯤 말하자면 이 영화는 단순한 범죄 영화가 아니고 심리 스릴러인 것이다. 만약에 순수한 범죄 영화였다면 영화는 내내 범죄를 위한 계획과 실행까지 보여주고 그러한 이야기만을 정렬을 했을 것이다. 기존에 뻔히 잡혀있는 설정이 있다면 이 영화는 그것을 조금 더 재치있게 정리한 것이다. 각 재주를 가진 캐릭터들은 보았지만 이 영화의 인물들은 그들의 성격만이 재미의 요소가 된다.


 어느 덧 많은 시간이 흐르고 쿠엔틴 타란티노는 수 많은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제는 익숙한 그의 작품 스타일이 신기하게도 전혀 진부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의 영화를 보기전에 거의 줄거리를 확인하지 않고 보게된다. 과거에 보았던 이 영화는 내겐 전혀 예상치 못한 작품이었다. 늘 그의 영화를 볼때마다 같은 기분이었는데 이미 나는 그에 대해 너무나도 익숙해져버렸고 그런만큼 그의 초기작이 더욱 빛나는 듯 싶다.